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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문화재

호좌수영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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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시문화원
2024-02-26 16:34 246 0
  • - 첨부파일 : 호좌수영 성지.jpg (44.8K) - 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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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연월일



호좌수영성은 북쪽의 종고산을 배경으로 삼고, 남동쪽의 얕은 예아산을 안산으로 하여 산줄기와 그 사이에 생긴 경사 지대 위에 축조한 일종의 평시 석성이다. 남,동 및 서쪽에 성문을 내고 남문 밖이 바로 바다와 맞닿게 하여 성체의 형태는 더욱 보기 힘들다. 영성은 다른 읍성과 비슷하게 쌓아졌는데 "호좌수영지"의 영성도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객사, 진남관이 가장 주용한 위치에 있다. 가로망은 남문에서 동헌과 객사로 이어지는 남북 축과 서문에서 동문까지의 동서 축이 서로 교차되는 곳에 객사와 동헌이, 동쪽에 중영, 서쪽에 향청이 있었다.

 호좌수영성은 성종 10년(1479) 내례 만호(內禮萬戶)를 철폐하여 수군절도영을 설치하고 수군절도사를 두면서 변화하였다. 성종 16년(1485년 3월) 초가집 대신에 성보를 쌓지 시작하여 1491년 완성되었다. 이후 연산군 3년(1497) ㅈ러도사 이량이 돌을 운반하여 장군도 왼쪽에 축대를 쌓았고, 선조 24년(1591)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해 서문 해자를 축조했다. 선조 26년(1593.7월)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충무공에 의해 거제 한산도로 진을 옮겼으나, 일년 후 절도사 이시언이 삼도를 통제할 제영사를 건설했다.

 이후 1664년 절도사 이도빈이 진남관, 망해루, 결승당을 재건했으나, 1716년 화재로 진남관이 소실되었고 1718년 절도사 이제면이 진남관을 다시 중건하였다. 허섬의 "호좌수영지"에 실린 성곽과 관아에 대한 사항은 임란을 거치면서 1895년 혁파 때까지 다소의 변화는 있었지만, 대체적인 전라좌수영의 면모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성종 21년 10월 완성된 전라좌수영은 "좌지동향 주회삼천육백삼십사척 동사장일천이백척 남북광구백팔척 보내수천북지순천부 육로이식이십칠리 동지평산포 수로사십리(坐地東向 周回三千六百三十四尺 東四長一千二百尺 南北廣九百八尺 堡內水泉北至順天府 陸路二息二十七里 東至平山浦 水路四十里)"라 하였으니, 성의 둘레가 3,634척인데 동서 길이 1,200척, 남북길이 908척으로 동서가 약간 긴 형상이었다. 새로운 건물이 세워지기도 하고, 불에 타버리기도 하였는데 1774년 절도사 김영수가 성을 보수한 뒤 기록한 것을 보면 곡성이 6곳이라 하였으니 치가 6개 있었음을 의미하며, 여기에 각각 포루를 6채를 세우고 화포기 6좌를 두었다고 한였다.

 1847년에 쓰여진 "호좌수영지"에는 체성 주위가 3,158포척이라 하였다. 당신에 포척 기준을 어디에 두었는지는 알수 없으나 치수에는 큰 차이가 없으며, 성안의 샘과 우물도 각각 6곳과 7곳으로 대체적인 규모는 크게 변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성종 년간의 규모를 당신의 영조척을 기준으로 산정하면 약 1133.44m가 되는데, 현재 성곽의 유지로서 실측되는 1.74km와 약간 차이가 난다. 이러한 차이는 이후에 설치되는 치성이나 옹성부분의 치수 산정, 또는 측량 방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현재는 메워진 도심 간선 도로가 된 굴강을 따라 남문에서 망해루와 진남관으로 이르는 남북 축은 그대로 유지되며, 서문에서 군자동과 중앙동의 경계인 골목길은 망해루에 이르고, 다시 여시서 진남관 동쪽 담장을 따라서 동헌에 이르러 동산동과 관문동의 경계인 골목길을 따라 동문에 이르는데, 도중에 중영과 장대인 고소대, 기타 건물들이 연결된다. 이러한 가로망은 현재 골목길로 변하여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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