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형문화재
곡화목관 선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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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지정번호
∗ 시대
∗ 소재지 여수시 화양면 화동리
∗ 규모
∗ 지정연월일
화양면 화동리 화양고등학교 앞에 5기의 감목관 선정비가 있는데, 1970년대까지 버스 정류장이 있는 곳에 15기 정도가 더 있었다고 한다. 5기중 3기는 만들어 세운(立碑)것이며, 2기는 고인돌 덮개돌에 늑기(勒記)하였는데 1기는 3명, 다른 1기는 2명의 비액(碑額)이 있어 전체 8명이 기명(記名)되어 있다. 입비(立碑) 3기는 도로변에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우측으로부터
① "행감목관구준원구민선정비(行監牧官具駿遠救民善政碑)"(높이 130cm×폭 40cm)
②"행감목관김후 선정비(行監牧官金候□善政碑)"(높이 110cm×폭 40cm)
③"후종염선정비(候宗琰善政碑)"(높이 90cm×폭 40cm)이다.
①은 감목관 구준원의 비로서 뒷면에 비문의 판독이 어려우나 끝 부분에 "도광십삼년계사년월립,감역침득(道光十三年癸巳年月立,監役沈得)"이라는 글이 있어 1833년(순조33)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②는 감목관 김후□의 비로서 이름과 비문 내용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으나 "함농사년갑인(咸農四年甲寅)"이라는 연대가 확인되어 1845년(철종5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③은 상부 1/3이 훼손되고 하단부에 "종염(宗琰)"이란 이름 정도가 확인될 뿐 뒷면의 비문도 판독이 불능한 상태이다. 불과 150여 년 전에 세워진 비가 이렇게 훼손된 것은 감목관의 지방민에 대한 횡포와 선정비를 "악정비(惡政碑)"로 여기는 지방민들의 감정 때문이라는 것과, 갑오 농민 전쟁때 농민군과 감목관이 동조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한편 입비 3기에서 10m 떨어진 고인돌 덮개돌을 이용하여 3명의 감목관 선정비를 한 돌에 새긴 것과 2명을 한 돌에 새긴 2기가 있는데 먼저 3명의 것은 오른쪽으로부터 ① "행감독관김후좌시감목관(行監牧官金候左時監牧官)" ② "행감목관송후유□감모관(行監牧官宋候維□監牧官)" ③ "행감목관정후현감목관(行監牧官鄭候鉉監牧官)"가 횡서로 나란히 늑기되엇고 다같이 가로 40cm×110cm의 크기이다. 그리고 왼쪽 아래 부분에 늑석년대(勒石年代)인 "무술 팔월(戊戌八月)"이란 명기(銘記)가 있다. 다른 하나는 ④ "행감목관윤후동계감목관(行監牧官尹候東啓監牧官)" ⑤ "행감목관신후□선정비(行監牧官申候□善政碑)"라고 새겨져 있고 좌단에 역시 "무술 팔년"이란 간지가 새겨져 있으며 크기는 앞의 것과 비슷하다. 먼저 살핀 입석 3기의 연대가 청나라 도광(道光)·함농(咸農)의 연호(순조-헌종-철종시대)임을 볼 때 이 고인돌의 무술년은 가장 가까운 주갑이 헌종 4년(1838)에 해당됨으로 이 해에 고인돌에 선정비가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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