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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문화재

윤형숙 의사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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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시문화원
2024-02-26 15:45 264 0
  • - 첨부파일 : 윤형숙 의사묘.jpg (56.4K) - 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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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연월일



윤형숙 의사는 1898년 화양면 창무리 4통 5호에서 윤치운의 3남 2녀중 장녀로 태어나, 순천 매산학교를 거쳐 광주 수피아여고에 재학중이었다. 1919년 서울에서 3·1 독립 만세 시위에 이어 3월 10일부터 광주에서도 학생과 시민들이 독립을 외쳤을 때, 윤형숙 의사는 시위 대열의 가장 앞에 서 있었다. 일본 군경들의 해산 명령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군중의 맨 앞에 서서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던 윤형숙 의사의 왼팔을 일본 헌병이 군도로 내리쳤다.

 잠시 쓰러졌던 윤형숙 의사는 땅에 떨어져 있는 태극기를 다시 오른팔로 잡고 일어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광경을 지켜 본 군중들은 비분 강개하여 더욱 맹렬히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고, 광주 만세 운동이 호남 전지역으로 확산되게 한 신호탄이 되었으며, 일본 군경에게 대한 여성의 절의를 보여주었다. 윤형숙 의사는 일본 헌병에게 붙들려 대구와 광주 형무소에서 4년의 옥고를 치르는 동안 심한 고문을 당하여 오늘쪽 눈마저 실명 당하고 불구의 몸이 되었다.

 석방된 이후 원산에 있는 마루다 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수학을 중단하고 요양을 위하여 전라북도 고창에 내려와 6년간 고창 유치원 강사로 활동하였다. 건강이 더 나빠지자 오바가 살고 있는 여수로 내려와 봉산 학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여수제일교회와 중앙교회 전도사로 근무하였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인민군이 여수를 점령하자 남면 심포 마을로 피신하였으나 예수를 믿게 하는 전도사란 이유로 내무서원에게 잡혀 투옥 중 서울이 수복되던 날인 1950년 9월 28일 둔덕동 과수원(현재 정수장)에서 손양원 목사와 함께 인민군들의 총에 맞아 향년 52세로 순교하였다.

 일본인들의 고문으로 결혼을 할 수 없었던 윤형숙 의사는 가까운 친척과 기독교인들의 도움으로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 마을이 바라보이는 소라면 관기리 산 80번지에 묘소를 만들고 비를 세웠다. 윤형숙 의사 행적은 이 나라의 독립을 염원하고 실천했던 의사중 의사였지만 그 어디에서도 "애국 지사"라고 추앙하거나 받들어 모신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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